우리는 매일 일상 속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볼펜이나 샤프를 집어 들고 메모를 남기곤 합니다. 저 또한 굉장히 메모를 좋아해서 집안 곳곳에서 갑자기 메모 할 때 사용하기 위해 주방, 작은방, 안방 가리지 않고 볼펜과 샤프를 비치해놓았습니다. 심지어 얼마전에는 친구가 폐업을 해서 남게 되었다며 필기구를 한 뭉치 제게 주기도 했습니다.
입학 선물이나 특별한 날 선물해주는 만년필이나 볼펜은 조금 더 비싸니 예외에 놓는다고 치고 보통의 볼펜은 지구에서는 볼펜이나 샤프는 문구점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고 일상 속에서 구하기 쉬운 소모품 중 하나입니다.
지구 궤도를 도는 국제우주정거장(ISS)의 우주비행사들은 메모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이런 간단한 볼펜이나 샤프를 들고 우주로 향할 수 있을까요?
사실을 알고 보니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일반 볼펜과 샤프는 우주선 내부에서 '반입 금지 품목'이자 치명적인 장비 에러를 유발하는 위험 물질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필기구 하나를 쓰기 위해 100만 원짜리 특수 펜을 개발해야만 했던 우주선의 상황을 알아보겠습니다.
중력이 없으면 한 글자도 적을 수 없는 일반 볼펜의 한계
우리가 지구에서 볼펜을 쓸 수 있는 이유는 아주 단순합니다. 지구의 '중력'이 볼펜 심 내부의 액체 잉크를 아래로 끊임없이 잡아당겨 주기 때문입니다. 잉크가 중력의 힘으로 펜 끝의 둥근 볼 쪽으로 흘러내려 와야 캔버스나 종이 위에 부드럽게 글씨가 써질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위아래가 없는 무중력 공간인 우주 정거장으로 가면 중력을 사용하는 볼펜은 당연히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중력이 없기 때문에 잉크가 펜 끝으로 이동하지 않고 심지어 잉크 속에 미세한 기포들이 둥둥 떠다니며 볼펜의 통로를 막아버립니다. 실제로 우주생활 초기에 일반 볼펜을 들고 간 우주인들은 단 몇 글자도 적지 못하고 펜이 먹통이 되는 현상을 겪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누워서 글씨를 쓰거나 천장을 보고 글씨를 쓸 때 볼펜이 나오지 않는 현상을 가끔 겪곤 합니다. 이 현상이 우주선 안에서는 24시간 내내 일어나는 셈입니다.

샤프심 조각은 움직이는 미사일? 샤프가 금지된 진짜 위험성
볼펜이 안 나온다는 사실을 깨달은 초기 우주인들은 아주 간단한 대안으로 '연필'이나 '샤프'를 사용했습니다. 흑연을 이용한 필기구는 중력과 상관없이 마찰력만으로 글씨를 쓸 수 있기 때문인데요. 하지만 NASA의 엔지니어들은 곧 샤프와 연필 사용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가이드라인을 세웠습니다. 그 이유는 흑연이 가진 물리적 특성 때문이었습니다.우리의 일상에서는 샤프를 쓰다가 툭 부러진 샤프심 조각이나, 연필을 깎을 때 나오는 미세한 흑연 가루들은 책상에 튀거나 바닥에 가라앉게 됩니다. 이 경우는 청소기로 슥-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무중력인 우주선 안에서는 부러진 날카로운 샤프심 조각이 공중에 총알처럼 둥둥 떠다니게 됩니다. 앞선 포스팅들에서 언급했듯 우주선은 강제 환기 팬(Fan)을 가동하기 때문에, 이 흑연 조각들이 공기 흐름을 타고 우주인의 눈이나 호흡기로 들어가 심각한 인체 부상을 입힙니다. 더 무서운 것은 흑연이 전기를 아주 잘 통하는 '도전성 물질'이라는 점입니다. 둥둥 떠다니던 미세한 샤프심 가루가 첨단 제어 장치의 전자 회로 틈새로 흘러 들어가면, 순식간에 합선(쇼트)을 일으켜 우주선 전체를 마비시키는 대화재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2026.05.28 - [분류 전체보기] - 국제우주정거장의 목숨 건 청소 가이드라인
민간 비즈니스가 구한 우주인들의 필기구 - 스페이스 펜(Space Pen)의 탄생
이 지독한 필기구 딜레마를 해결하기 위해 수많은 엔지니어가 머리를 맞댔고, 미국의 발명가 폴 피셔(Paul Fisher)가 이끄는 민간 비즈니스 기업이 마침내 해결책을 찾았습니다. 약 100만 달러 이상의 개발비를 투자해 만든 우주선 전용 필기구, 바로 '스페이스 펜(Space Pen)'입니다.
스페이스 펜의 내부는 완벽하게 밀봉된 질소 가스 시스템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중력이 잉크를 밀어주지 못하므로 펜 내부의 초정밀 가스 밸브가 뒤에서 약 3.5기압의 압력으로 잉크를 24시간 내내 힘차게 밀어내는 하이테크 레거시를 탑재한 것입니다. 여기에 사용된 잉크 역시 평소에는 고체에 가까운 젤 형태를 유지하다가 펜 끝의 볼이 굴러가며 마찰 열과 압력을 받는 순간에만 액체로 변화하는 특수 초점성 잉크가 적용되었습니다. 이 덕분에 영하 30도의 혹한부터 영상 120도의 뜨거운 태양광 아래서는 물론 물속이나 기름이 묻은 종이 위에서도 완벽하게 글씨가 써지는 신기한 필기구 가이드라인이 완성되었습니다. NASA는 이 기술력을 인정하여 스페이스 펜을 우주 공식 지정 필기구로 채택했습니다.
사소한 인프라가 보장하는 지구의 안전함
우주인들이 샤프심 한 조각이 눈에 들어갈까 봐 사용하지 못하고 100만 원에 달하는 특수 가압 펜을 들고 수동으로 메모를 남겨야 하는 상황은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가 얼마나 멋진 곳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부러진 샤프심이 아래로 툭 떨어지고, 미세한 가루들이 대기 중으로 퍼지지 않고 바닥에 떨어지는 곳. 그리고 세 가닥의 손가락만 있으면 몇 백 원짜리 볼펜으로도 영감을 막힘없이 적어 내려갈 수 있는 이 환경은 적당한 중력있는 지구에서만 허락된 일 입니다. 우주에서는 인간의 지식을 기록하는 아주 행위조차 가스 압력 공학과 재료 역학이 동원 되야지만 하는 엄격한 통제의 영역이 됩니다.
책상 위에 놓인 샤프를 눌러 가느다란 심을 빼내고, 일기장이나 노트에 사각사각 글씨를 적어 내려가는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순간.
샤프 가루가 장비를 터뜨리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고, 볼펜 잉크가 나오지 않아 펜을 허공에 세차게 흔들지 않아도 되는 우리의 하루가 감사하게 느껴집니다. 오늘 업무를 보시거나 작은 메모를 남기실 때 손끝에 쥐어진 필기구 너머로 펼쳐지는 우주 엔지니어링을 떠올리며 내 손 안의 작은 볼펜 한 자루가 주는 일상의 편리함을 즐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