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렸을 때 블랙홀을 처음 알게 되면서 제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있다면, 반대로 모든 것을 뱉어내는 화이트홀도 있지 않을까? 그때는 정말 단순한 상상이었습니다. 온통 어두운 블랙홀의 반대편에는 눈부시게 빛나는 화이트홀이 있을 거라고 믿었죠. 밀어내는 건지, 뱉는 건지 그 기준조차 모호했지만 어린 제게는 그저 신기한 우주의 쌍둥이처럼 느껴졌습니다.
블랙홀 방정식이 숨긴 쌍둥이, 화이트홀의 탄생
화이트홀은 사실 천문학자의 관측이 아니라 물리학자의 펜 끝에서 먼저 태어난 존재입니다. 1915년 독일의 과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는 아인슈타인의 중력장 방정식을 풀면서 블랙홀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증명했습니다. 그런데 이 방정식에는 묘한 시간 대칭성이 숨어 있었습니다.
물리학의 많은 법칙들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도 똑같이 성립합니다. 당구공이 부딪히는 영상을 역재생해도 물리 법칙상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말이죠. 아인슈타인의 중력 방정식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것을 흡수하는 해가 존재한다면, 반대로 모든 것을 방출만 하는 해도 수학적으로 반드시 존재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화이트홀입니다.
화이트홀은 블랙홀의 시간을 거꾸로 되감은 것과 같습니다. 블랙홀이 빛과 물질을 끌어당겨 삼킨다면, 화이트홀은 반대로 빛과 물질을 뱉어내기만 합니다. 블랙홀 영상을 역재생하면 빨려 들어가던 물질이 맹렬하게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화이트홀의 작동 방식입니다.
하지만 이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실제로도 존재하는 건 아닙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열역학 제2법칙이었습니다. 우주는 무질서도가 증가하는 방향으로만 시간이 흐르는데, 화이트홀은 무질서한 에너지가 갑자기 한 점에서 질서 정연하게 뿜어져 나오는 것이니 열역학적 시간의 화살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게다가 화이트홀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지 물리적 과정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1980년대 이후 화이트홀에 관한 논의는 급속히 사그라들었습니다. 수학 속에만 존재하는 유령 같은 존재로 남게 된 것이죠.
블랙홀이 화이트홀로 변하는 순간
그런데 최근 들어 화이트홀 가설이 다시 주목받고 있습니다. 양자 역학과 중력을 결합한 루프 양자 중력 이론 덕분입니다. 이 이론에 따르면 블랙홀 속의 물질들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한계인 플랑크 길이까지 압축됩니다. 이 상태를 플랑크 별이라고 부르는데, 이 순간 더 이상 압축이 진행되지 않고 오히려 양자 반발력이 나타나 물질을 바깥으로 밀어내는 반등 현상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정말 흥미로웠습니다. 블랙홀이 영원한 종착점이 아니라 화이트홀로 전환되는 진화 과정의 한 단계라는 설명이었습니다. 마치 우주가 블랙홀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는 블랙홀 우주론과도 비슷한 메커니즘입니다.
이 이론이 흥미로운 건 블랙홀의 오래된 수수께끼를 해결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상대성 이론은 블랙홀 중심부에 부피는 없고 중력과 밀도는 무한한 특이점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물리학자들은 무한대라는 개념을 극도로 꺼립니다. 이론의 결과값에서 무한대가 나온다는 건 이론 자체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루프 양자 중력 이론에서는 더 이상 작아질 수 없는 시공간의 픽셀을 상정하므로 특이점 자체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블랙홀 정보 역설도 덩달아 해결됩니다. 차곡차곡 모아놨던 물질을 토해내는 것일 뿐이므로 열역학 법칙에도 위배되지 않습니다.
더 놀라운 건 암흑 물질과의 연결입니다. 우주 초기에 형성된 수많은 미니 블랙홀들은 이미 오래전에 반등을 겪고 플랑크 질량 규모의 화이트홀 잔해로 우주에 떠다닐 수 있습니다. 이 잔해들은 빛과 거의 상호작용하지 않으면서 질량을 가지고 중력을 행사합니다. 천문학자들이 그토록 찾던 암흑 물질의 특성과 정확히 일치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까지 화이트홀을 단 한 번도 목격하지 못했을까요? 그 해답은 중력이 시간을 왜곡시킨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블랙홀 속에서 플랑크 별이 반등하며 화이트홀로 전환되는 시간은 블랙홀 내부에서는 찰나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 막강한 중력 때문에 시간 지연 효과가 발생합니다. 블랙홀 밖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 사건이 관측되기까지 수십억, 어쩌면 수조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제 경험상 이런 시간 지연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GPS 위성의 시계가 지상보다 상공에서 미세하게 빨리 가는 것처럼, 중력은 시간을 실제로 왜곡시킵니다. 우리는 지금 수많은 블랙홀의 강력한 중력이 만드는 우주적인 지연 방송을 보고 있는 셈입니다.
2006년 관측된 감마선 폭발 GRB 060614는 현재까지 유일한 화이트홀 관측 후보입니다. 이 폭발은 100초 이상 길게 지속되었지만 통상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초신성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과학자들은 우주 초기에 생성된 작은 원시 블랙홀이 마침내 수명을 다하고 화이트홀로 반등하며 내뿜은 흔적일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숫자와 연산일 뿐인 방정식에서 벗어나는 존재가 없다는 게 정말 신기합니다. 블랙홀은 처음에 수식 상에만 있는 존재였지만 결국 실존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화이트홀도 블랙홀 반대편에 있는 수식 상의 존재인데, 만약 이것도 실존한다면 우리가 사는 이 우주는 몇 번째 반복일까요? 플랑크 규모의 한 점에서 폭발적으로 팽창하는 양자적 반등 현상은 138억 년 전 우리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과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우주에 대해 알면 알수록 이 순간을 더욱 감사히 느끼게 됩니다. 시작되고 끝나고 다시 시작되는 것이 반복된다면, 이 삶도 결국 찰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찰나 때문에 힘들어하기보다는 순간을 즐기는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설에서 시작해서 검증까지 과학은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눈으로 보지 않았다고 없다고 생각해버리면, 우리 지구도 여전히 네모날 것이고 블랙홀도 펜 끝에만 있을 겁니다. 차세대 망원경과 중력파 탐지기가 언젠가 화이트홀의 신호를 포착한다면, 그때 우리는 우주의 영원한 순환을 진짜로 목격하는 첫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